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립 마운트배튼 (문단 편집) ==== 계속되는 시련 =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46C1D97-9FD3-465B-A4D2-23E8B795F3EA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1934년, 13살''' || 1933년, 필리포스는 [[독일]]로 건너가 슐레 슐로스 잘렘(Schule Schloss Salem)[* [[바덴 대공국]]의 대공자인 당주 [[막시밀리안 폰 바덴]]의 후원을 받아 쿠르트 한이 1920년 독일 남부 잘렘에 설립한 기숙학교이다. 필립은 둘째 누나 가족 소유의 학교이기 때문에 학비를 아끼려고 침 스쿨을 떠나 잘렘에 입학했다.]에 입학한다. 잘렘 학교는 둘째 누나 테오도라의 남편 바덴의 베르톨트의 소유였기 때문에 누나 가족과 함께 지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7A76B378-B273-4500-8C05-BF675262C879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오른쪽에서 6번째, 잘렘 시절의 필리포스.[br]뒤 쪽에 [[하켄크로이츠]] 깃발이 걸려있다. ''' || 잘렘에서 지내는 동안 [[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|나치당]]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. 어느 날 [[유대인]] 학생이 반유대주의자에 의해 [[삭발]]을 당하자 필리포스는 이 모욕적인 대우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침 스쿨 [[모자]]를 씌워주었다. 쿠르트 한에 따르면 필리포스는 사람들이 [[나치]] 경례를 할 때마다 크게 웃었으며, [[경고]]를 받은 후에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고 한다. 결국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다시 [[영국]]으로 돌아가야한다고 갑작스럽게 결정했다. 필리포스는 잘렘에 다닌 지 2학기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[[스코틀랜드]]의 고든스턴 스쿨(Gordonstoun School)에 입학했다. 고든스턴 스쿨 역시 슐레 슐로스 잘렘의 설립자인 쿠르트 한(Kurt Hahn)이 스코틀랜드로 건너와[* 쿠르트 한은 유대계 독일인이라 [[나치당]]에 반기를 들었다. 결국 나치가 집권하고 [[유대인]] 탄압이 본격화되자, 1933년에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추방되었다.] 세운 기숙학교였으니 자매학교로 전학한 셈이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prince phillip 1935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1935년, 14살''' || 고든스턴 스쿨은 전교생 모두가 [[기숙사]]에서 생활하는 기숙사제로 운영되었으며, 특유의 체력장 문화와 엄한 학풍으로 유명했는데, 단순히 학문이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육체적으로 단련시키는, 마치 [[사관학교]]를 방불케 하는 학교였다. 필리포스는 이런 스파르타식 학풍이 본인의 성정과 잘 맞았는지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한다. 이후에도 필리포스는 모교인 고든스턴에 많은 애정을 가져 기부도 지속적으로 했고, 장남 [[찰스 3세]]도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. 그러나 유약한 [[찰스 3세]]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고 폐쇄적인 이곳의 생활을 몹시 싫어해 [[향수병]]에 시달렸으며, 동급생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해[* 이는 남동생들인 [[앤드루 왕자]]와 [[에드워드 왕자]]도 마찬가지였다.] 부자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고, 훗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[[윌리엄 왕세자]]와 [[해리 왕자]]를 [[상류층]] 자제들만 다니는 학교인 [[이튼 칼리지]]에 재학시켰다. 1937년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다. 셋째 누나 [[그리스와 덴마크의 카이킬리아|체칠리아]]가 [[런던]]에서 열리는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족들과 함께 [[영국]]으로 가던 도중 [[벨기에]] 오스텐더 상공에서 [[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|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]]가 난 것. 이 사고로 매형과 넷째를 임신 중이던 만삭의 누나, 어린 조카 2명까지 전원 사망했다.[* 이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동행하지 않아 살아남은 막내딸 요한나는 숙부 루트비히에게 입양되었으나 2년 뒤 수막염으로 사망한다. 이후 루트비히 또한 자녀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된다.] 필리포스는 사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행기의 작은 잔해를 간직했다고 한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8BB8C06-C043-46AF-8475-DC7449BA01F4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1937년, 다름슈타트에서 엄수된 헤센 대공가의 장례식. (선두 오른쪽에서 2번째, 제복군인들 사이)'''[* 선두에 서있는 제복군인들 중 3명은 필립의 매형들이다. 첫째 줄은 루트비히 폰 헤센 공자. 둘째 줄은 왼쪽부터 고트프리드 호엔로에-랑겐부르크 공, 크리스토프 폰 헤센 공자(SS 제복), 필립 폰 헤센 공자(SA 제복), 필립 공(에든버러 공작), 베르톨트 폰 바덴 공.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뒤에서 뾰족한 해군 모자를 쓰고 있으며, [[조지 6세]]와 [[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|엘리자베스 왕비]]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. 이 장례식에는 [[헤르만 괴링]]이 직접 착석했다.] || 설상가상으로 누나 가족의 장례식을 치른 뒤 불과 몇달 후, [[후견인]]이던 큰 외삼촌 밀포드 헤이븐 후작이 [[암]]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. 연휴마다 같이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가장 아끼던 셋째딸의 죽음 이후 필리포스를 버리다시피 하고 [[모나코]]에서 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[[카지노]]를 전전하며 살다가 1944년 말 모나코에서 사망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034756-1624293582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1938년, 17살''' || 딸의 장례식에서 근 7년 만에 아들을 만난 [[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|앨리스 왕자비]]는 필리포스와 데리고 다시 왕정이 복고된 [[그리스]]로 돌아가고 싶어했다. 그러나 이미 [[루이 마운트배튼]] 백작이 죽은 형을 대신해[* 밀포든 헤이븐 후작의 아들이었던 데이비드가 후작위를 자리를 물려받았으나, 필리포스보다 고작 2살 많았을 뿐더러 [[미성년자]]였기에 누군가의 후견인을 맡을 처지가 아니었다.] 필리포스의 [[후견인]]을 자처하며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고, 필리포스도 루이 마운트배튼을 사실상 아버지로 여긴데다가 [[영국해군사관학교]]에 진학하며 [[해군]]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[* 1995년 인터뷰에서 해군으로 입대하게 된 것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영향이라고 직접 밝혔다. 기자의 질문은 “전하의 할아버지들 모두 해군에 몸담으셨고, 아버지는 육군에 계셨었지만 전하는 원래 공군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. 그런데 왜 결국 해군을 선택하게 되었나요?”였는데, 대답은 “결국 외삼촌(마운트배튼경)한테 설득당했으니까요.”였다.]에 불안정한 [[그리스]]로 돌아가기 보다는 [[영국]]에 남는 선택을 한다. 훗날 그는 영국 신문 [[인디펜던트]]와의 인터뷰에서 “어렸을 때 댁에서 ([[영어]], [[프랑스어]], [[독일어]] 중)[* 필립의 모국어인 [[그리스어]]는 너무 어린 시절에 그리스를 출국해 대화는 다소 서툰 편이었으나,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했다고 한다.] 무슨 말을 쓰셨나요?”라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. >'''‘집에서’라는게 무슨 뜻이죠?[br]What do you mean ‘at home’?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